가스레인지, 기후 악당 오명 쓰고 퇴출 당한다?
주방 필수품 가스레인지가 기후 변화의 주범 중 하나라고? 미국에서 퇴출 위기에 놓인 가스레인지 논란에 대해 알아보자.
오랜 기간 주방 필수품으로 자리해 온 가스레인지. 전기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 등 진화를 거듭하는 막강한 신생 가열 도구의 출현에도, 강력한 화력의 가스레인지는 가정과 식당의 주방공간을 굳건히 차지해 왔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가스레인지가 기후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돼 퇴출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전기레인지 사용과 비교해 어마어마하게 배출되는 탄소량과 비효율적인 에너지 등급, 여기 더해 사용자의 건강까지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지난 한 세기 동안 함께해 온 가스레인지가 돌연 인류의 환경과 건강을 위협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사연을 자세히 짚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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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권에 불 붙인 가스레인지 규제 논란
가스레인지 사용의 위해성은 그동안 여러 연구를 통해 간헐적으로 알려져 왔지만,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건 2023년 새해 벽두였다. 올해 초 미국 뉴욕주가 가정에서의 가스레인지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캐시 호컬(Kathy Hochul) 뉴욕주 주지사는 지난 1월 10일,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가스레인지, 보일러 등의 취사와 난방 기구 사용을 금지할 것’을 전격 제안했다. 이에 앞서 하루 전날인 1월 9일, 미국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Consumer Product Safety Commission, CPSC)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가스레인지가 건강 문제는 물론, 심각한 실내 공기 오염을 일으키고 있다’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CPSC): 제품 안전기준 제정, 소비자 교육프로그램 개발, 위해 유발 제품 리콜 등의 소비자안전 업무를 관장하는 미국연방정부기관.
이에 대해 미국가스협회장은 ‘천연가스 사용 규제는 소외 계층에 저렴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혜택을 가로막고, 소비자의 편익과 선택권을 줄이는 처사’라며 반발했다. 또 짐 조던(Jim Jordan) 오하이오주 공화당 하원의원 역시 자신의 트위터에 “신. 총기. 가스레인지.”, 단 세 개의 단어를 올리며, 종교와 총기 규제에 이어 가스레인지가 미국의 핵심 쟁점으로 등극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해당 트윗은 나흘 만에 조회수 770만 회를 넘길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고, 이렇게 점화된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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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레인지는 정말 ‘건강’과 ‘기후’에 나쁠까?
논란의 핵심은 가스레인지가 실제로 건강 문제와 대기 오염을 일으키냐는 것일 터. 이와 관련해 2020년 미국 비영리 에너지 정책 싱크탱크인 RMI(Rocky Mountain Institute, 로키마운틴연구소)는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는 가정이 전기레인지를 사용하는 집보다 호흡기에 유해한 기체인 이산화질소의 농도가 50~400% 더 높으며, 일산화탄소도 30배 더 많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 이어 RMI는 2022년 12월 의대 연구진과 함께 가스레인지의 영향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국제 환경 연구 및 공중보건 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Environmental Research and Public Health, IJERPH)’에 공개했는데, 미국 내 소아 천식 사례 중 12.7%의 원인이 가스레인지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호흡기 질환의 강력한 유발 원인이 다름 아닌 가스레인지라는 것.
또한 건강 뿐 아니라, 기후 위기에 가스레인지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스탠포드대 연구진이 캘리포니아 53개 가정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스레인지를 켰을 때 뿐만 아니라, 꺼진 상태에서도 역시 ‘메탄’이 누출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2022, Environmental Science and Technology) 메탄은 인체에 유해하진 않지만 이산화탄소보다 온실가스 효과가 수십 배 더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구진은 이렇게 미국 가정에서 20년 동안 가스레인지를 통해 배출하는 메탄의 양은 휘발유 자동차 50만 대가 내뿜는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가 무색할 정도로, 꺼진 가스 불도 기후 변화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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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가스 사용의 판도를 바꾸기 위한 노력들
정치적 논란과 이해관계를 거두고 다양한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이산화탄소와 일산화탄소, 미세먼지 등을 발생시키는 가스레인지의 퇴출은 예고된 수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스레인지를 인덕션 등의 전기레인지로 바꾸더라도, 전기차의 에너지원처럼 에너지원 자체도 친환경일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화석연료로 만든 에너지원으로 전기레인지를 사용하는 것은 당장 집안 내 미세먼지 농도를 낮출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올바른 기후 위기 대응인지에 대한 물음엔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명쾌한 정답은 아니더라도 미국에서는 천연가스 사용을 금지하고 전기 전환을 목표로 삼는 지역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2019년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시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새 주택과 상업용 건물에서 천연가스 연결을 금지했고, 뒤이어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등 캘리포니아의 50개 이상 도시가 잇따라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제품을 금지했다.(2019,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천연자원보호협회) 덧붙여 미국 워싱턴주의 건축규정위원회(State Building Code Council, SBCC)는 주 정부의 탄소배출 감축정책에 따라 2022년 새로 짓는 주택과 아파트에 전기 히트 펌프 설치를 요구하는 규정을 통과시킨 데 이어, 신축 단독주택에 대한 전기 히트 펌프 설치 규정도 9대 5로 가결했다. 전기 히트 펌프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냉난방 기구로 지구 온난화의 해결 수단으로 손꼽힌다.
미국 내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뉴욕시의회도 마찬가지로 2019년 신축건물의 화석연료 이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법안에 따라 뉴욕은 올해 말부터 7층 이하 건물에, 2027년부터는 고층 건물에 천연가스 설치가 금지된다. 대신, 전기를 사용하는 난방과 보일러, 스토브 등을 갖춰야 한다. RMI는 뉴욕시의회의 법안이 성공적으로 시행된다면, 연간 자동차 45만 대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맞먹는 양을 감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2021, Stopping Gas Hookups in New Construction in NYC Would Cut Carbon and C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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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다리지 말고 움직일 때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우리나라 가구 수는 2021년 기준 2,329만으로 전체 가구 수의 82.9%(한국가스안전공사)에 이른다고 한다. 최근 들어 전기레인지 판매량이 가스레인지를 넘어서고는 있지만, 미국처럼 탄소 중립을 목표로 천연가스 난방 시스템을 전기 주택으로 전환하는 공공 아젠다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가스레인지 퇴출 논란은, 1960년대 미국 내 담배 퇴출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는 촌평이 있다. 어느새 TV와 공공장소에서 퇴출된 담배처럼, 가스레인지도 언젠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담배 퇴출까지 소요된 세월을 감안할 때, 가스레인지가 우리 곁에서 천천히 사라질 때까지 기후 변화도 우리를 기다려 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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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권에 불 붙인 가스레인지 규제 논란
가스레인지 사용의 위해성은 그동안 여러 연구를 통해 간헐적으로 알려져 왔지만,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건 2023년 새해 벽두였다. 올해 초 미국 뉴욕주가 가정에서의 가스레인지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캐시 호컬(Kathy Hochul) 뉴욕주 주지사는 지난 1월 10일,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가스레인지, 보일러 등의 취사와 난방 기구 사용을 금지할 것’을 전격 제안했다. 이에 앞서 하루 전날인 1월 9일, 미국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Consumer Product Safety Commission, CPSC)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가스레인지가 건강 문제는 물론, 심각한 실내 공기 오염을 일으키고 있다’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CPSC): 제품 안전기준 제정, 소비자 교육프로그램 개발, 위해 유발 제품 리콜 등의 소비자안전 업무를 관장하는 미국연방정부기관.
이에 대해 미국가스협회장은 ‘천연가스 사용 규제는 소외 계층에 저렴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혜택을 가로막고, 소비자의 편익과 선택권을 줄이는 처사’라며 반발했다. 또 짐 조던(Jim Jordan) 오하이오주 공화당 하원의원 역시 자신의 트위터에 “신. 총기. 가스레인지.”, 단 세 개의 단어를 올리며, 종교와 총기 규제에 이어 가스레인지가 미국의 핵심 쟁점으로 등극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해당 트윗은 나흘 만에 조회수 770만 회를 넘길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고, 이렇게 점화된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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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레인지는 정말 ‘건강’과 ‘기후’에 나쁠까?
논란의 핵심은 가스레인지가 실제로 건강 문제와 대기 오염을 일으키냐는 것일 터. 이와 관련해 2020년 미국 비영리 에너지 정책 싱크탱크인 RMI(Rocky Mountain Institute, 로키마운틴연구소)는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는 가정이 전기레인지를 사용하는 집보다 호흡기에 유해한 기체인 이산화질소의 농도가 50~400% 더 높으며, 일산화탄소도 30배 더 많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 이어 RMI는 2022년 12월 의대 연구진과 함께 가스레인지의 영향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국제 환경 연구 및 공중보건 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Environmental Research and Public Health, IJERPH)’에 공개했는데, 미국 내 소아 천식 사례 중 12.7%의 원인이 가스레인지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호흡기 질환의 강력한 유발 원인이 다름 아닌 가스레인지라는 것.
또한 건강 뿐 아니라, 기후 위기에 가스레인지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스탠포드대 연구진이 캘리포니아 53개 가정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스레인지를 켰을 때 뿐만 아니라, 꺼진 상태에서도 역시 ‘메탄’이 누출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2022, Environmental Science and Technology) 메탄은 인체에 유해하진 않지만 이산화탄소보다 온실가스 효과가 수십 배 더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구진은 이렇게 미국 가정에서 20년 동안 가스레인지를 통해 배출하는 메탄의 양은 휘발유 자동차 50만 대가 내뿜는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가 무색할 정도로, 꺼진 가스 불도 기후 변화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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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명쾌한 정답은 아니더라도 미국에서는 천연가스 사용을 금지하고 전기 전환을 목표로 삼는 지역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2019년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시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새 주택과 상업용 건물에서 천연가스 연결을 금지했고, 뒤이어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등 캘리포니아의 50개 이상 도시가 잇따라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제품을 금지했다.(2019,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천연자원보호협회) 덧붙여 미국 워싱턴주의 건축규정위원회(State Building Code Council, SBCC)는 주 정부의 탄소배출 감축정책에 따라 2022년 새로 짓는 주택과 아파트에 전기 히트 펌프 설치를 요구하는 규정을 통과시킨 데 이어, 신축 단독주택에 대한 전기 히트 펌프 설치 규정도 9대 5로 가결했다. 전기 히트 펌프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냉난방 기구로 지구 온난화의 해결 수단으로 손꼽힌다.
미국 내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뉴욕시의회도 마찬가지로 2019년 신축건물의 화석연료 이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법안에 따라 뉴욕은 올해 말부터 7층 이하 건물에, 2027년부터는 고층 건물에 천연가스 설치가 금지된다. 대신, 전기를 사용하는 난방과 보일러, 스토브 등을 갖춰야 한다. RMI는 뉴욕시의회의 법안이 성공적으로 시행된다면, 연간 자동차 45만 대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맞먹는 양을 감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2021, Stopping Gas Hookups in New Construction in NYC Would Cut Carbon and C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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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가스레인지 퇴출 논란은, 1960년대 미국 내 담배 퇴출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는 촌평이 있다. 어느새 TV와 공공장소에서 퇴출된 담배처럼, 가스레인지도 언젠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담배 퇴출까지 소요된 세월을 감안할 때, 가스레인지가 우리 곁에서 천천히 사라질 때까지 기후 변화도 우리를 기다려 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