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보호를 위해 수건을 재사용해주세요!”
호텔에 체크인한 당신, 수건 옆에 뜻밖의 내용이 적힌 메모를 발견한다. 바로 “환경보호를 위해 수건을 재사용 해달라”는 내용. 메모엔 당당하게 녹색 재활용 마크까지 찍어 두었다. 정작 호텔은 환경보호를 위해 하는 일이 없는데, 고객에게 불편을 떠넘기며 친환경이라고 생색까지 낸 것. 이런 메모를 보면 의아함을 넘어선 분노가 치밀지 않을까? 이는 1983년 미국의 환경운동가 제이 웨스터벨트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그는 호텔의 이런 행태를 비판하며 ‘그린워싱(Greenwashing)’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처럼 최근 자주 보이는 단어 그린워싱은 얼핏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의 결합으로 보이지만, 그 뜻은 정반대다. Green(녹색)과 White washing(세탁)이 합쳐진 단어로, 우리나라 말로 하면 ‘위장 환경주의’ 또는 ‘녹색 거짓말’이다. 말 그대로 친환경이 아니면서 친환경인 척 꾸미거나 속여 이득을 취하는 걸 의미한다.
ESG 요구에 손쉬운 생색 내기, 그린워싱
그린워싱은 ESG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 ESG 경영 공시나 유럽연합의 ESG 실사 시행 등 국내외 투자자들의 기업을 향한 ESG 경영 요구가 높아지고 자신의 가치관을 소비로 표현하는 ‘미닝아웃(Meaning out)’ 소비자가 늘면서 기업 경영에 ESG 적용은 필수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친환경은 기업의 주요 ESG 활동이 되었는데, 이러한 환경 변화는 기업에 부담이 되기도 한다. 지난 7월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국내 수출 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내 기업의 52%가 ESG 미흡으로 계약이나 수주가 파기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 그린워싱이다. 그린워싱에 대한 법적 기준은 아직 없지만, 캐나다 친환경 컨설팅 업체 ‘테라초이스(Terra Choice)’가 2009년 발표한 ‘그린워싱이 저지르는 7가지 죄악들’이 하나의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에코라는 이름의 속임수
그린워싱 사례 중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것이 ‘상충 효과 감추기’다. 친환경으로 알려진 아이템이나 소재를 사용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만, 전체적으로 따져 보면 친환경이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에코백’이다. 에코백의 본래 취지는 친환경이 맞다. 2007년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Anya Hindmarch)가 환경단체와 함께 에코백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당시 에코백에는 ‘나는 플라스틱 가방이 아니야(I’m not a Plastic Bag)’라는 문구가 디자인되어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비닐봉지의 대체품임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 캠페인은 영국에서 크게 주목받아 에코백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실제로 영국의 비닐봉지 사용량이 줄어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문제는 이후에 생겼다. 에코백이 전 세계로 퍼져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아이템 중 하나가 됐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굿즈와 기념품의 필수 품목이 되면서 친환경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에코백의 취지는 한 번 사용하고 버려지는 비닐봉지 대신 다회용품인 에코백을 사용함으로써 환경 파괴를 줄이자는 것이었는데, 유행을 탄 뒤 수많은 에코백이 만들어지고 버려지면서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에코백이 판매되는 현시점에서, 생산부터 폐기까지의 과정을 살피면 오히려 비닐봉지가 에코백보다 친환경적이다. 에코백의 소재인 면을 생산하고 가공하는 데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투입되기 때문이다.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비닐봉지와 비교했을 때, 면 재질의 에코백은 131번을 재사용해야 환경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고,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 비닐봉지와 비교하면 7,100번 재사용해야 친환경 효과가 나타난다(영국 환경청, 2011). 또 유기농 면으로 만든 에코백은 2만 번 재사용해야 환경 보호 효과가 있다(덴마크 환경식품부, 2019). 결국 기업이 매 시즌 새로운 에코백을 판매하면서 친환경이라 주장하는 건 그린워싱이라는 지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녹색 거짓말하다 불 같은 분노에 직면한 기업들
그린워싱으로 친환경 흉내를 내는 건 쉬울지 몰라도, 속임수가 드러나면 대가는 어마어마하다. 미국 동물복지∙친환경 계란 판매 기업으로 유명한 바이털팜은 2020년 13억 달러(약 1조 4,000억 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으며 상장까지 했다. 하지만 그 뒤 1년도 되지 않아 소비자에 집단 소송을 당했다. 바이털팜은 알을 낳지 않는 수탉은 도살하고 좁은 공간에서 닭들이 서로 쪼지 못하도록 부리를 깎아내는 등 닭에게 사료가 아닌 풀을 먹인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공장형 양계장과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친환경 계란이라고 홍보해 이득을 취했다는 것이 소송의 이유였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바이털팜의 주가는 상장 시점 대비 절반 수준으로 폭락했다.
2015년 국내 자동차 시장을 뒤흔든 아우디폭스바겐의 ‘디젤게이트(Dieselgate)’도 대표적인 그린워싱 사례다. 당시 아우디폭스바겐은 아우디 디젤 차량에 친환경 시스템이 설치돼 있어 유럽의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는 것처럼 광고했으나, 인증시험 모드에서만 유해 물질을 덜 배출하고 실제 주행 모드에서는 다량 배출하도록 배기가스 저감장치를 조작하는 소프트웨어를 탑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일로 아우디폭스바겐은 2019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373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으며, 이후 6년간 아우디폭스바겐은 한국에서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높아진 고객 눈높이와 친환경 초보인 기업들
이처럼 그린워싱 사례가 늘어나면서 기업 활동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눈은 예전보다 더 매서워졌다. 이니스프리의 종이 보틀 논란은 엄격해진 고객의 잣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니스프리는 2020년 ‘그린티 씨드 페이퍼 보틀’을 출시하며 겉면에 ‘안녕, 나는 종이 병이야.(Hello, I’m Paper Bottle)’라는 문구를 넣었다. 하지만 1년 뒤 한 소비자가 케이스를 분해한 결과, 겉면은 종이였지만, 내부에 플라스틱 용기가 사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확산되며 논란이 됐고, 결국 이니스프리는 정확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해 혼란을 야기한 점을 사과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그린워싱으로 보기에는 지나치다는 여론도 있었다. 해당 종이 보틀은 기존 용기보다 플라스틱 사용을 51.8% 절감해 만든 것이었고, 제품 안내서와 홈페이지에는 플라스틱이 사용됐다는 점이 표기돼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페이퍼 보틀이라는 표현을 전면에 표기해 병 전체가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오해를 사긴 했으나, 플라스틱 절감에 나서지 않은 다른 화장품 회사들보다 친환경을 위해 노력했던 것만은 사실이지 않냐는 것이었다.
지난해 가을 스타벅스의 다회용 컵 이벤트 사례 역시 비슷하다. 스타벅스는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나온 ‘플라스틱 빨대 사용 자제’ 요청에 종이 빨대를 전면 적용했고, 일회용 컵이 아닌 다회용 컵 사용도 확대했다. 그러나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음료를 무료로 다회용 컵에 담아주는 이벤트가 문제였다. 고객들의 다회용 컵 수집 과열 현상에 오히려 불필요한 플라스틱 컵 사용이 늘었고, 기획 의도와 달리 컵을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는 논란이 제기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스타벅스 관계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회용 컵 사용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고객들의 친환경 활동 동참을 위해 진행한 행사인데, 눈앞에 드러난 현상만으로 그린워싱이라고 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위와 같은 사례가 늘자, 친환경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면 기업들이 논란을 두려워해 친환경 경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들의 제품과 행보가 실제로 친환경적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동종 업계에 비해 친환경 관련 새로운 시도를 적극적으로 펼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만큼 그린워싱에 대한 사회적인 기준과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녹색 거짓말 탐지기의 정확도를 높여라!
다행히 최근 그린워싱의 기준이 속속 세워지고 있는데, 현재 그린워싱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은 금융과 광고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친환경 산업을 확실하게 정의한 것은 유럽이다. 유럽연합은 2020년 친환경 산업에 대한 분류 기준,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를 발표했다.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된 산업들은 친환경 산업을 대상으로 한 투자를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해 말 친환경 산업 분류 기준인 K-택소노미를 발표해 친환경 기업들이 투자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광고에서는 기준이 더 일찍 마련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부터 ‘환경성 표시·광고’라는 법적 개념을 토대로 그린워싱을 감시한다. 이 관련법에 따르면 친환경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구체적인 근거와 범주를 한정해 표시·광고해야 한다. 법을 위반해 부당한 표시·광고를 한 사례에는 관련 매출액의 2%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으며, 위반 기간과 횟수에 따라 30~50%까지 가중치를 부과할 수 있다. 최근에는 중소기업 제품이 환경성과 관련해 허위·과장 광고 등으로 과징금 부과나 형벌을 받으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게 하는 법안도 발의됐다.
이처럼 그린워싱을 막기 위한 제도들이 속속 도입되고 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친환경 마케팅이 유행인 탓에 지금의 법과 제도로는 각양각색의 사례를 모두 검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결국 그린워싱인지 아닌지는 소비자가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린워싱 판단에 고객이 참고할 수 있는 지표가 있다. 바로 정부에서 부여한 각종 친환경 표지다. 친환경 표지는 크게 공산품과 서비스, 음식에 관한 것으로 나눠지는데, 생산 과정에서 에너지를 적게 쓰거나 탄소 배출을 적게 하는 등의 친환경적인 요소를 정부가 인정했을 때 부여한다. 그린워싱이 날로 교묘해지고 친환경 마케팅의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워지는 요즘, 아래의 친환경 표지를 활용하면 현명한 녹색 소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