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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급 멸종위기종,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다가올 미래가 겁나요’, ‘우리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몰라요’ 전세계가 앓고 있는 증상. 코로나 블루가 저물자 ‘기후우울증’이 떠오르고 있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에게 멸종은 다른 종(種)들의 이야기였다. 셀 수도 없는 숱한 전쟁으로 서로를 그토록 죽이고서도 인구가 80억 가까이 불어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오히려 인구가 너무 많으니 줄여야 한다는 음모론까지 인기를 끌면서, 우주의 기운을 모은 핑거 스냅으로 인구의 반을 우주 먼지로 만드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제 호모사피엔스 앞에 실제로 ‘멸종 위기’라는 단어가 붙을 날이 머지 않았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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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에 물러설 수 없는 청소년들이 모였다!

‘#우리도위기가보여’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9월 23일 글로벌 기후파업 현장. (출처: 청소년기후행동)

“나는 1급 멸종위기종인 대한민국 청소년입니다.”

고등학생 나호윤 군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9월 23일 서울 용산역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며 열린 ‘글로벌 기후 파업’ 현장에서 외친 절박한 표현이다. 나 군는 현장 발언에서 “8년 뒤에 기후위기로 인한 위험이 극도로 심각해진다는데, 그때 난 고작 25살”이라며 기후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했다. 그리고 나 군의 곁엔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 수십 명의 청소년이 함께였다.

나호윤 군과 같이 기후변화로 우울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환경 문제를 막지 못하면 결국 인류가 파멸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만성적 무력감, 분노, 죄책감, 우울감. 이것을 기후불안증(Climate Anxiety) 혹은 기후우울증(Climate Depression)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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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우울, 전 세계에 퍼지고, 일상으로 파고들다

요즘 ‘기후 우울증’에 걸리고 있다는 젊은 세대들 (출처: KBS시사직격 유튜브 채널)

기후우울증은 2011년 기후변화가 끼치는 심리적인 영향에 관한 논문이 발표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The psychological impacts of global climate change’/ Thomas J. Doherty, Susan Clayton). 그리고 2017년 미국 심리학회(APA,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가 *환경 불안(Eco-Anxiety)이란 용어로 기후우울증을 정의한 이후, 곳곳에서 기후위기로 인한 우울감, 불안감의 심각성을 뒷받침하는 조사 결과가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환경 불안(Eco-Anxiety): 기후 변화로 만성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이로 인해 극심한 우울, 불안을 느끼는 상태.

미국 심리학회(APA)가 2019년 시행한 설문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68%가 기후 변화로 인한 불안을 느끼고, 18~34세 성인의 47%는 기후 변화 스트레스로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국의 만 14~59세 청소년 및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4.2%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으며, 평균 60.9%는 이미 기후 변화의 부정적 영향을 체감하고 있다고 답했다(기후 변화와 나의 생활환경 인식조사/초록우산어린이재단, 2021).

기후변화 대응이 힘든 에너지빈곤가정 공익광고 (출처: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유튜브 채널)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젊은 세대는 기후우울을 더 예민하게 느낀다. 지난해 영국 배스대학교(University of Bath)에서 10개 나라 16-25세 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7%가 기후 변화 탓에 “미래가 두렵다”고 했으며, 68%는 기후 변화로 인한 슬픔을, 63%는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기후우울은 그들의 미래 계획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미국 Z세대(18~23) 78%는 기후변화 때문에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거나, 낳고 싶지 않아 한다고 답했으며(Seventh Generation/OnePoll, 2020), 영국에서는 ‘기후위기를 막으려는 정치적 노력 없이는 가족을 꾸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출산 파업이 2018년부터 진행 중이다.

기후우울과 관련된 연구 결과들은 이제 국제기구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공론화되는 단계에 들어섰다. 올해 2월에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에서, 6월에는 세계보건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가 기후변화가 정신건강에 위협을 미치고 있다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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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우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기후우울에 여전히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우울감이나 불안이 주관적 감정인 탓에 사회적 문제라기보단 일부 사람의 특성이며, 단순히 ‘기분’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실제로 정신 질환을 일으킨다.

‘정신 건강’ 위협하는 기후 위기 (출처: 뉴스EBS 유튜브 채널)

폭염 등으로 신체의 체온 조절이 한계에 다다르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증가하고 체온을 조절하는 중추 신경에 이상이 발생하는 등의 신체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이는 정신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정신질환으로 응급실에 입원한 환자 7명 중 1명은 폭염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있다(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김호 교수 연구팀, 2018). 같은 연구에 따르면, 폭염에 의한 정신질환 추정 비율은 불안이 31.6%로 가장 많았고, 치매 20.5%, 조현병 19.2%, 우울증 11.6%로 그 뒤를 이었다.

폭염은 공격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격성을 적정 수준으로 통제하는 뇌 화학물질, 세로토닌이 고온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스위스 취리히대 공동연구팀이 세계 각국의 연구를 10개 이상 검토한 결과(2022), 주변 온도가 1~2℃만 올라가도 폭력 범죄가 3~5% 증가할 수 있으며, 2090년까지 기후변화로, 모든 범주의 범죄가 전 세계에서 최대 5%까지 증가할 것으로 추정됐다.

무엇보다 기후변화는 인간을 스스로 죽게 만든다. 기온 상승에 떠밀린 인간들이 자살을 택하고 있다는 섬뜩한 사실 역시 여러 연구에서 드러났다. 그중 하나로 미국 스탠포드의 마샬 버크(Marshall Burke) 교수가 이끈 연구팀은 월평균 기온이 1℃ 상승할 때 미국에서의 월간 자살률은 0.68%, 멕시코에서는 2.1%씩 증가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들은 앞으로 이산화탄소 배출이 억제되지 않으면 미국과 캐나다에서 2050년까지 기온 상승으로 인해 9,000명에서 4만 명이 더 자살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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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에 압도되지 않는 작은 행동이 우릴 살린다!

이쯤 되면 1급 멸종위기종을 자처한 고등학생의 발언이 더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영화 또는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소비됐던 기후재난은 사실 우리들을 위한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모두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기후우울을 앓고 있을 수만은 없다. 특히나 미래 세대가 잠재하고 있을 능력을 썩히고, 그들의 자녀를 낳는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상상조차도 두려운 결말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후행동, 기후정의다. 기후 변화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일들을 실천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용산역에 모여 기후위기에 대응하라는 목소리를 높인 청소년들의 기후 파업과 영국의 출산 파업 역시 하나의 예다. 기후정의를 외치는 개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정부도 자연스레 우리들의 필요와 요구를 캐치한다. 시기 적절하게 만들어진 정책과 법안은 더 많은 변화를 유발하고, 그러한 변화들이 결국 전 세계적인 흐름을 만들어낼 것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레타 툰 베리.

청소년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 베리(Greta Thunberg)도 11살 때 기후우울을 심하게 앓아 두 달 만에 몸무게가 10kg나 줄었다. 하지만 툰 베리는 이를 이겨냈고, 밖으로 나가 기후위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어른들에 대한 항의로 학교 파업을 선언해 주목을 끌었던 어린이는, 이제 세계 정상들 앞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환경 운동가가 되었다.

툰 베리는 “우리는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소리친다. 현실에서의 영웅은 비범함보다는 평범함에 가깝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기후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 이를 실천할 방법을 찾아보는 것. 이러한 과정을 지인들과 함께하는 것이 툰 베리가 말하는 진정한 영웅이 되는 길이자 기후우울에서 벗어날 손쉬운 방법이다.

현생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 남은 것은 어쩌면 공감을 통한 연대와 배려 때문일지 모른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 시나리오를 막을 비책도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부디 호모 사피엔스가 기후우울에 잠식되지 않고, 공감하는 능력을 발휘해 멸종 위기를 자신 있게 벗어나는 날이 오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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