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기술의 첨단화, ITAD의 미래
AI 성능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그 이면에서는 수명을 다한 고성능 전자장비가 시장에 쏟아지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ITAD는 이 장비를 다시 쓰고, 해체하고, 핵심 소재를 회수하며 남아 있는 정보를 완전히 지우는 고도 기술 산업이다. 이 영역에서 축적한 역량으로 AI 인프라의 ‘보이지 않는 부담’을 미래 성장의 기회로 전환하고 있는 SK에코플랜트와 SK테스를 알아보자.


곽재식
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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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D, 인공지능 시대의 ‘두 번째 전쟁터’
경주에서 열린 2025년 APEC 회의 기간 동안 수많은 뉴스가 쏟아졌지만,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이야기는 정치가 아니라 기술에서 나왔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NVDIA)가 한국에 무려 26만 장의 GPU를 판매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는 소식이다. 세계 주요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회의였지만, 그 어떤 외교적 논의보다도 이 숫자가 더 큰 주목을 받았다.
GPU는 인공지능 개발의 심장이라 불리는 반도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GPU 1만 개를 제때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오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26만 장이다. 단순한 숫자 차이를 넘어, 기술 패권의 규모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GPU 한 장의 가격을 대략 3만 달러라고 잡아도 총액은 약 11조 원이 넘는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다. 한국 공군이 보유한 F-35 스텔스 전투기가 39대 정도인데, 그 전투기를 100대 이상 살 수 있는 돈이 GPU에 투입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GPU 26만 장이란 어지간한 나라의 군사력과 맞먹을 만한 자금을 인공지능을 위한 장비에 투자한다는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뒤집어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시대인 지금은 그야 말로 인공지능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세계 여러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막대한 돈을 퍼부으며 기술력으로 대결하는 시대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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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속도는 폐기의 속도와 함께 간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분량의 컴퓨터 부품을 사들이고 나면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까? 이번에 들여올 최신 GPU는 엔비디아가 2024년에 발표한 ‘블랙웰(Blackwell)’ 아키텍처 기반 제품이 주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 세대는 2022년에 출시된 ‘호퍼(Hopper)’였다. 호퍼는 컴퓨터 과학자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의 이름을, 블랙웰은 수학자이자 통계학자인 데이비드 블랙웰(David Blackwell)의 이름을 따왔다. 엔비디아의 이런 명명 전략에서도 기술 기업의 상징 자본이나 홍보 감각을 엿볼 수 있지만, 지금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세대의 간격이 고작 2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약 2년 뒤에는 블랙웰을 능가하는 또 다른 세대의 GPU가 등장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지금 막 수십만 장 단위로 구축되는 GPU 서버들은 그때쯤 이미 ‘지난 세대의 장비’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구형 장비라 해도 당장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첨단 산업의 세계에서는 ‘아직 쓸 수 있는 장비’라 하더라도 새 기술의 효율과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교체의 명분이 된다.

이런 일은 이미 과거에도 반복되어 왔다. 데이터센터에서 서버 교체 주기는 대체로 3~5년이다. 길어도 6~7년을 넘기기 어렵다. 자동차 수명이 평균 10년이 넘고, 건물은 수십 년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하면 전자 장비의 세대교체 속도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다.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 몇 년마다 수십만 개에 달하는 값비싼 전자 부품이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이런 교체 주기는 더 짧아지고 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구형으로 변해 버린 그 값비싸고 정교한 제품들을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온당한가 하는 문제가 큰 고민거리가 된다.
게다가 이런 고성능 전자제품은 다른 쓰레기와 다르다. 시대에 뒤처져 교체되는 것이지 대부분의 기능은 여전히 멀쩡하게 작동한다. 오래된 스마트폰을 떠올려 보면 쉽다. 배터리 용량이 줄고 외관에 흠집이 생겨도 전화와 카메라 기능은 여전히 쓸 만하다. 그런데 이런 장비를 음식물 쓰레기나 낡은 가구처럼 그냥 태워 없애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다.
그래서 주목받는 것이 IT 제품과 고성능 전자장비의 폐기를 전문으로 하는 ITAD(IT Asset Disposition), 즉 IT 자산 처분 산업이다. 이 산업은 단순히 ‘버리는 일’이 아니라, ‘다시 쓰는 기술’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영역이다. 고성능 부품을 정밀하게 분해하고, 재사용 가능한 요소를 식별하며, 폐기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자원 회수 효율을 극대화한다. 기술이 빨라질수록, 그 속도를 따라가는 처리의 기술 역시 중요해진다. 기술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버리는 기술 역시 첨단화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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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기술에서 다시 가치를 찾는 일, ITAD
그렇다면 이렇게 버려지는 고성능 전자제품들은 정말 그냥 쓰레기에 불과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기능이 아직 살아 있는 장비는 재사용과 재활용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 그래서 IT 제품과 고성능 전자 장비의 폐기를 전문으로 하는 산업인 ITAD가 주목받는다.

ITAD는 단순히 장비를 버리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제품을 분해해 부품 단위로 나누고, 필요하면 다른 장비에 재활용하거나, 배터리·회로·금속 같은 소재를 회수해 새 제품에 쓰는 과정까지 포함된다.
예를 들어, 5년 전에 나온 스마트폰의 부품을 분해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저렴한 장난감에 활용할 수도 있다. 장난감 제조사 입장에서는 부품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스마트폰을 폐기하는 입장에서는 처리해야 할 쓰레기를 줄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실제 SK에코플랜트는 반도체 종합 서비스 사업의 한부분으로 ITAD 전문 자회사 SK테스(SK tes)를 통해 IT 자산의 처리∙재활용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관련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SK테스는 현재 전 세계 20여개국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전자폐기물 수거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으며, 반도체부터 데이터센터 서버 등 미래 핵심산업으로 분류되는 자원에 대한 전문 회수 처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한 제품의 부품을 다른 제품에 돌려쓰는 방법을 찾기 유리하다. 공단 거리에 나가 “이 부품 가져갈 사람!”이라고 외치면 곧바로 익숙한 기술자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즉, 한국 산업계는 재사용 부품의 수요와 공급을 매칭하기 좋은 환경이다.
SK테스가 처리한 메모리 스토리지 제품 등 IT자원을 또다른 SK에코플랜트 자회사 에센코어가 SSD, SD카드 등 메모리 제품으로 재가공해 공급하는 경우도 수요 공급을 매칭해 순환 공급망을 구축한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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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용을 넘어 ‘소재 회수’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부품에 포함된 금속이나 소재를 화학적·기계적으로 분리해 재활용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배터리에는 리튬, 니켈, 코발트가 들어 있고, 회로 연결에는 구리가, 반도체 내부에는 소량의 금이 쓰인다.
이런 고가 소재는 회수만 잘해도 새로운 산업적 가치가 생긴다. 한국은 반도체와 화학 산업이 발달해 있어 이런 면에서 유리하다. 예를 들어 SK에코플랜트 관계 계열사들 중에 반도체와 화학 산업의 경험이 풍부한 곳들이 많다. 이것은 가장 심도 있는 방법으로 사용된 IT 자산에서 가치를 창출해 내기에 유리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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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일의 또 다른 책임, ‘정보’
전자 제품은 상당 부분 기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버려지기 때문에, ITAD 사업에는 또 하나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보안 문제다. 인공지능 시대에 대량으로 폐기되는 고성능 전자 제품 속에는 기업의 핵심 영업 비밀이나 철저히 보호되어야 하는 기술 정보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SNS부터 금융 기관까지, 기업이 고객의 정보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관리해야 하는 일이 매우 많다. 만약 이런 정보가 외부로 유출된다면 기업의 활동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ITAD 사업에서는 믿을 만한 사업자가 폐기물 속 정보를 가로채려고 하지 않는다는 굳건한 신뢰를 기반으로 제품 내부의 정보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언뜻 보면 단순한 쓰레기 처리처럼 보여도, 이 같은 수준의 보안을 확보하려면 상당한 기술력과 경험이 필요하다. 게다가 꾸준히 실적을 쌓아 주요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 아시아, 북미 등 20여개국 40여개의 처리시설을 운영하는 SK테스를 평가할 때도 세계 주요 고객들과 얼마나 폭넓은 관계를 맺어 왔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ITAD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나라
이 세 가지 특징에서 두루 경쟁력을 갖고 있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많지는 않다. 유럽 업체들은 화학 기술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반도체와 IT 산업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아 폐기 제품을 입수해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지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크다. 반대로 미국 업체들은 반도체와 IT 산업에서는 대체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다양한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이 충실히 발달해 있지 못해서 재사용, 재활용한 자원을 판매하거나 처리할 여력이 제한적이다. 중국 업체들은 기술적으로 폐기 전자 제품을 처리할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최근 각국 간의 정치, 외교적 변수로 인해 장치 내 정보를 얼마나 철저히 잘 지켜 줄 지에 대한 신뢰 확보 면에서 한계가 있다.
이러한 환경을 고려하면, 막대한 양의 장비를 도입해 인공지능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것만큼이나 폐기물 처리와 자원 회수 분야에서 한국 업체들은 세계 어느 곳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는다. 특히 도시에서 버려지는 폐기물 속 금속 자원을 회수하는 사업 성과를 ‘도시 광산’이라 부르며 강조하는 사례가 근래 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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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순환
애초에 전자 제품이란 각종 금속, 약품,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료를 조합해 만들어져, 오랫동안 사용을 다한 기기의 처리가 골칫거리였다. 땅에 묻어도 썩지 않고 불에 태워 없애고자 해도 잘 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난제를 정교하게 다룰 기술력을 갖추고 있고, 전망 있는 사업으로 키워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인공지능 시대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는 일이 될 것이다. 화려한 26만 장의 최신 GPU들도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고, 결국 AI 모델 훈련을 마친 IT 자산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정리하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최전선’ 뒤에는, 그 자산을 안전하고 가치 있게 마무리하는 또 하나의 산업이 존재한다. ITAD는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일이며,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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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교수는 2006년 단편 〈토끼의 아리아〉가 MBC에서 영상화된 이후 소설가로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쓴 책으로는 소설 《고래 233마리》, 《지상최대의 내기》, 《이상한 용손 이야기》,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과 글 쓰는 이들을 위한 책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한국 전통 괴물을 소개하는 《한국 괴물 백과》, 과학 논픽션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휴가갈 땐 주기율표》 등이 있다. KBS 〈주말 생방송 정보쇼〉, SBS 〈김영철의 파워FM〉, 채널A〈인간적으로〉등 대중매체에서도 활약 중이다. 공학박사이며, 현직 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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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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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U는 인공지능 개발의 심장이라 불리는 반도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GPU 1만 개를 제때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오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26만 장이다. 단순한 숫자 차이를 넘어, 기술 패권의 규모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GPU 한 장의 가격을 대략 3만 달러라고 잡아도 총액은 약 11조 원이 넘는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다. 한국 공군이 보유한 F-35 스텔스 전투기가 39대 정도인데, 그 전투기를 100대 이상 살 수 있는 돈이 GPU에 투입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GPU 26만 장이란 어지간한 나라의 군사력과 맞먹을 만한 자금을 인공지능을 위한 장비에 투자한다는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뒤집어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시대인 지금은 그야 말로 인공지능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세계 여러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막대한 돈을 퍼부으며 기술력으로 대결하는 시대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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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속도는 폐기의 속도와 함께 간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분량의 컴퓨터 부품을 사들이고 나면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까? 이번에 들여올 최신 GPU는 엔비디아가 2024년에 발표한 ‘블랙웰(Blackwell)’ 아키텍처 기반 제품이 주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 세대는 2022년에 출시된 ‘호퍼(Hopper)’였다. 호퍼는 컴퓨터 과학자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의 이름을, 블랙웰은 수학자이자 통계학자인 데이비드 블랙웰(David Blackwell)의 이름을 따왔다. 엔비디아의 이런 명명 전략에서도 기술 기업의 상징 자본이나 홍보 감각을 엿볼 수 있지만, 지금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세대의 간격이 고작 2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약 2년 뒤에는 블랙웰을 능가하는 또 다른 세대의 GPU가 등장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지금 막 수십만 장 단위로 구축되는 GPU 서버들은 그때쯤 이미 ‘지난 세대의 장비’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구형 장비라 해도 당장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첨단 산업의 세계에서는 ‘아직 쓸 수 있는 장비’라 하더라도 새 기술의 효율과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교체의 명분이 된다.

이런 일은 이미 과거에도 반복되어 왔다. 데이터센터에서 서버 교체 주기는 대체로 3~5년이다. 길어도 6~7년을 넘기기 어렵다. 자동차 수명이 평균 10년이 넘고, 건물은 수십 년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하면 전자 장비의 세대교체 속도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다.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 몇 년마다 수십만 개에 달하는 값비싼 전자 부품이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이런 교체 주기는 더 짧아지고 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구형으로 변해 버린 그 값비싸고 정교한 제품들을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온당한가 하는 문제가 큰 고민거리가 된다.
게다가 이런 고성능 전자제품은 다른 쓰레기와 다르다. 시대에 뒤처져 교체되는 것이지 대부분의 기능은 여전히 멀쩡하게 작동한다. 오래된 스마트폰을 떠올려 보면 쉽다. 배터리 용량이 줄고 외관에 흠집이 생겨도 전화와 카메라 기능은 여전히 쓸 만하다. 그런데 이런 장비를 음식물 쓰레기나 낡은 가구처럼 그냥 태워 없애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다.
그래서 주목받는 것이 IT 제품과 고성능 전자장비의 폐기를 전문으로 하는 ITAD(IT Asset Disposition), 즉 IT 자산 처분 산업이다. 이 산업은 단순히 ‘버리는 일’이 아니라, ‘다시 쓰는 기술’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영역이다. 고성능 부품을 정밀하게 분해하고, 재사용 가능한 요소를 식별하며, 폐기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자원 회수 효율을 극대화한다. 기술이 빨라질수록, 그 속도를 따라가는 처리의 기술 역시 중요해진다. 기술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버리는 기술 역시 첨단화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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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기술에서 다시 가치를 찾는 일, ITAD
그렇다면 이렇게 버려지는 고성능 전자제품들은 정말 그냥 쓰레기에 불과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기능이 아직 살아 있는 장비는 재사용과 재활용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 그래서 IT 제품과 고성능 전자 장비의 폐기를 전문으로 하는 산업인 ITAD가 주목받는다.

ITAD는 단순히 장비를 버리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제품을 분해해 부품 단위로 나누고, 필요하면 다른 장비에 재활용하거나, 배터리·회로·금속 같은 소재를 회수해 새 제품에 쓰는 과정까지 포함된다.
예를 들어, 5년 전에 나온 스마트폰의 부품을 분해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저렴한 장난감에 활용할 수도 있다. 장난감 제조사 입장에서는 부품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스마트폰을 폐기하는 입장에서는 처리해야 할 쓰레기를 줄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실제 SK에코플랜트는 반도체 종합 서비스 사업의 한부분으로 ITAD 전문 자회사 SK테스(SK tes)를 통해 IT 자산의 처리∙재활용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관련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SK테스는 현재 전 세계 20여개국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전자폐기물 수거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으며, 반도체부터 데이터센터 서버 등 미래 핵심산업으로 분류되는 자원에 대한 전문 회수 처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한 제품의 부품을 다른 제품에 돌려쓰는 방법을 찾기 유리하다. 공단 거리에 나가 “이 부품 가져갈 사람!”이라고 외치면 곧바로 익숙한 기술자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즉, 한국 산업계는 재사용 부품의 수요와 공급을 매칭하기 좋은 환경이다.
SK테스가 처리한 메모리 스토리지 제품 등 IT자원을 또다른 SK에코플랜트 자회사 에센코어가 SSD, SD카드 등 메모리 제품으로 재가공해 공급하는 경우도 수요 공급을 매칭해 순환 공급망을 구축한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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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용을 넘어 ‘소재 회수’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부품에 포함된 금속이나 소재를 화학적·기계적으로 분리해 재활용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배터리에는 리튬, 니켈, 코발트가 들어 있고, 회로 연결에는 구리가, 반도체 내부에는 소량의 금이 쓰인다.
이런 고가 소재는 회수만 잘해도 새로운 산업적 가치가 생긴다. 한국은 반도체와 화학 산업이 발달해 있어 이런 면에서 유리하다. 예를 들어 SK에코플랜트 관계 계열사들 중에 반도체와 화학 산업의 경험이 풍부한 곳들이 많다. 이것은 가장 심도 있는 방법으로 사용된 IT 자산에서 가치를 창출해 내기에 유리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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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일의 또 다른 책임, ‘정보’
전자 제품은 상당 부분 기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버려지기 때문에, ITAD 사업에는 또 하나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보안 문제다. 인공지능 시대에 대량으로 폐기되는 고성능 전자 제품 속에는 기업의 핵심 영업 비밀이나 철저히 보호되어야 하는 기술 정보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SNS부터 금융 기관까지, 기업이 고객의 정보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관리해야 하는 일이 매우 많다. 만약 이런 정보가 외부로 유출된다면 기업의 활동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ITAD 사업에서는 믿을 만한 사업자가 폐기물 속 정보를 가로채려고 하지 않는다는 굳건한 신뢰를 기반으로 제품 내부의 정보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언뜻 보면 단순한 쓰레기 처리처럼 보여도, 이 같은 수준의 보안을 확보하려면 상당한 기술력과 경험이 필요하다. 게다가 꾸준히 실적을 쌓아 주요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 아시아, 북미 등 20여개국 40여개의 처리시설을 운영하는 SK테스를 평가할 때도 세계 주요 고객들과 얼마나 폭넓은 관계를 맺어 왔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ITAD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나라
이 세 가지 특징에서 두루 경쟁력을 갖고 있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많지는 않다. 유럽 업체들은 화학 기술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반도체와 IT 산업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아 폐기 제품을 입수해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지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크다. 반대로 미국 업체들은 반도체와 IT 산업에서는 대체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다양한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이 충실히 발달해 있지 못해서 재사용, 재활용한 자원을 판매하거나 처리할 여력이 제한적이다. 중국 업체들은 기술적으로 폐기 전자 제품을 처리할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최근 각국 간의 정치, 외교적 변수로 인해 장치 내 정보를 얼마나 철저히 잘 지켜 줄 지에 대한 신뢰 확보 면에서 한계가 있다.
이러한 환경을 고려하면, 막대한 양의 장비를 도입해 인공지능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것만큼이나 폐기물 처리와 자원 회수 분야에서 한국 업체들은 세계 어느 곳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는다. 특히 도시에서 버려지는 폐기물 속 금속 자원을 회수하는 사업 성과를 ‘도시 광산’이라 부르며 강조하는 사례가 근래 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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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순환
애초에 전자 제품이란 각종 금속, 약품,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료를 조합해 만들어져, 오랫동안 사용을 다한 기기의 처리가 골칫거리였다. 땅에 묻어도 썩지 않고 불에 태워 없애고자 해도 잘 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난제를 정교하게 다룰 기술력을 갖추고 있고, 전망 있는 사업으로 키워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인공지능 시대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는 일이 될 것이다. 화려한 26만 장의 최신 GPU들도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고, 결국 AI 모델 훈련을 마친 IT 자산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정리하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최전선’ 뒤에는, 그 자산을 안전하고 가치 있게 마무리하는 또 하나의 산업이 존재한다. ITAD는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일이며,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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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교수는 2006년 단편 〈토끼의 아리아〉가 MBC에서 영상화된 이후 소설가로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쓴 책으로는 소설 《고래 233마리》, 《지상최대의 내기》, 《이상한 용손 이야기》,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과 글 쓰는 이들을 위한 책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한국 전통 괴물을 소개하는 《한국 괴물 백과》, 과학 논픽션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휴가갈 땐 주기율표》 등이 있다. KBS 〈주말 생방송 정보쇼〉, SBS 〈김영철의 파워FM〉, 채널A〈인간적으로〉등 대중매체에서도 활약 중이다. 공학박사이며, 현직 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